세계 경제

세계 5위 부자가 된 오라클 래리 엘리슨 회장

지난 10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발표한 ‘미국 400대 부자 리스트’에서 5위를 차지한 주인공은 미국 소프트웨어 회사인 오라클의 창업자 래리 엘리슨이었다. 엘리슨은 493억 달러의 재산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냉혹한 조직 관리와 정확한 미래 예측으로 거대 네트워크 제국을 건설한 실리콘밸리 신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스피드, 사치, 미인을 사랑하는 열정과 욕망의 승부사. 그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지 알아본다.

‘실리콘밸리의 신화’ 오라클의 창업자이자 세계 5위 부자
지난해 3월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가 발표한 ‘세계 부자 순위’에서 공식적인 기록만 543억 달러의 재산을 소유해 세계 5위, 미국 3위에 이름을 올린 래리 엘리슨(Larry Ellison). 올해 71세인 래리 엘리슨은 전 세계 시장 40%를 점유하고 있는 세계 최대 데이터베이스 개발 업체이자 마이크로소프트와 쌍벽을 이루는 소프트웨어 기업 ‘오라클’의 창립자이자 실리콘 밸리의 초기 개척자다.

‘실리콘밸리의 악동’이라 불릴 만큼 사치스런 생활과 기행으로 잘 알려져 있는 래리 엘리슨은 우리에게 영화 <아이언맨>의 주인공인 토니 클라크의 실제 모델이자 <아이언맨 2>에 직접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한 인물로 더 유명하다. 또한 빌 게이츠, 애플 창업주 풀 앨런, 마이클 델, 마크 저커버그와 같이 대학중퇴자이지만, ‘기회의 땅’ 실리콘밸리에서 괴짜 소리를 들으며 결국 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창의력으로 쌍두마차를 이뤘던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는 평생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래리 엘리슨은 1977년 오라클 창업 때부터 2014년 9월까지 37년간 CEO로서 경영을 진두지휘했으며, 현재 회장 이사회 의장 겸 최고기술담당으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실리콘밸리 개척자 중 마지막 현역인 셈이다.

마이크로 소프트사와 쌍벽 이루는 SW왕국을 건설하다
래리 엘리슨은 1970년대에 명문 대학을 중퇴하고 실리콘밸리로 와서 소프트웨어 개발에 나섰다. 그가 대학을 그만둔 것은 실리콘밸리로 가서 창업을 하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래리 엘리슨의 복잡한 가정사와 성장 과정이 관련돼 있다.
러시아 유대인 출신인 래리 엘리슨은 1944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당시 19세의 미혼모로, 그가 생후 9개월 때 폐렴에 걸리자 양육을 포기했다. 이후 래리 엘리슨은 시카고에 사는 중산층 유대 집안으로 입양됐다. 그에 따르면 양어머니는 따뜻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양아버지에 대해서는 배려 없고 엄격한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어릴 때부터 양아버지에 대한 적대심을 키워 나갔으며, 이는 엘리슨의 성장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엘리슨은 보금자리였던 양어머니가 죽자 다니던 명문대를 그만두고 무작정 캘리포니아로 가서 반문화를 체험했다. 당시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한 샌프란시스코 주변 지역은 히피들의 천국으로 현실에서 도피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는 Wells Fargo Bank에서 기술자 감독관, 소방수 연금보험에서 IBM Mainframe 관리 등 컴퓨터 관련 일자리를 찾아 돌아다녔다.
그는 20대 시절, 직업은 변변치 않아 버는 돈이 없었지만 쓰는 데는 전혀 인색하지 않았다. 은행 대출의 도움을 받아 첫 요트를 구매했고 성형 수술을 했고 1000달러 넘는 자전거를 구매했다. 이와 관련 엘리슨의 주변인들은 엘리슨이 어린 시절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돈’을 추구했던 버릇이 오히려 그가 사업을 꾸려나가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엘리슨이 자존감을 위해 돈을 버는 것에 집중했고, 무엇보다 번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 한 데이터베이스 회사에서 일하던 엘리슨은 그곳에서 창업 동지인 에드 오우츠와 로버트 마이너를 만났으며, 이들과 단돈 1200달러로 ‘시스템개발연구소(SDL)’를 창업하게 된다. 이후 엘리슨은 회사 이름을 ‘오라클’로 바꾸고, 회사 내 직급을 파괴하고 마케팅을 중시하는 경영 전략을 펼치게 된다.
당시 ‘품질이 좋은 제품이 잘 팔리는 게 아니라 고객이 원하는 제품이 잘 팔린다’는 그의 지론은 신생 기업이던 오라클을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줬다. 더불어 사람들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카리스마,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고한 믿음, 주저하지 않는 결단,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려는 ‘도전 정신’ 또한 엘리슨에게 성공을 가져다 준 요인이다.

시대 변화 유연하게 대처하는 탁월한 기지의 소유자
지금으로부터 무려 8년 전인 2008년, 래리 엘리슨은 투자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클라우드 컴퓨팅이라는 트렌드에 업계가 완전히 횡설수설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미친 얘기인데 언제쯤 이런 얼빠진 짓을 그만둘 거냐"고 맹비난한 바 있다. 하지만 3년 후인 2011년 오라클은 퍼블릭 클라우드 서비스 진출을 공식 선언했다.
특히 경쟁사인 세일즈포스닷컴을 비난하며 ‘멀티테넌트는 끔찍한 기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멀티테넌트는 마치 일상생활에서의 ‘쉐어룸’처럼 거실이나 화장실 등을 공유하는 형태를 뜻한다. IT관점에서의 멀티테넌트는 하나의 소프트웨어를 여러 사용자가 이용하도록 한 기술을 말한다.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와 기존 ASP(임대형 애플리케이션)을 구분 짓는 핵심 기술이 바로 멀티테넌트다. 즉 SaaS를 제공하기 위해선 멀티테넌트 기반의 아키텍처가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멀티태넌트를 끔찍한 기술이라고 비판했던 오라클은 2012년 자사의 데이터베이스관리시스템(DBMS) 신제품 12c를 내놓으면서 핵심 기능 중 하나가 멀티테넌트라고 강조하고 나섰다.
오라클의 다양한 SaaS 역시 멀티테넌트 기반으로 운영된다. 당시 비난과 조롱의 분위기가 파다했지만, 래리 엘리슨은 예전의 발언은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2012년에 오라클은 서비스형 인프라(IaaS) 시장에도 진출한다고도 밝혔다. 이전까지 래리 엘리슨은 "IaaS에 뛰어들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지만, 그해 열린 오픈월드에서 오라클만이 할 수 있는 IaaS를 제공하겠다고 또 다시 입장을 뒤집은 것이다.

외강내유 리더십으로 신뢰를 바탕으로 한 혁신을 이끌다
"나는 모든 일에 질문을 던지는 성격 덕분에 지금의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 나는 통념에도 의문을 품었고 전문가들의 말에도 질문을 던졌다. 사실 이런 성격 때문에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러나 이는 인생에서 꼭 필요하다."
이것은 래리 엘리슨이 남겨 유명해진 명언이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쿨한 스타일을 잊지 않는다. 또한 경쟁을 즐기고 승리를 갈망하는 야망형 인간이다. 그러나 최근 밝혀진 그의 사생활은 그런 그의 이미지를 반전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외신 비즈니스인사이더에 따르면, 래리 엘리슨이 밖에서는 독설을 날리는데 반해 사내에서는 매우 조용한 스타일의 신중한 리더라고 한다. 평소 경쟁사에 대해 지속적인 독설을 멈추지 않고 주변의 비판에 아랑곳 하지 않는 등 탱크처럼 전진하는 그가 사내에서는 매우 신사적이며 특히 중요한 회의에서 경청을 주로 하는 조용한 태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혁신가로서 항상 질문과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그가 외부의 시각에서는 다소 시끄럽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괴상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를 따르고 의지하는 오라클의 직원들에게만큼은 항상 먼저 의견을 말하게 하고, 귀 기울여 들어주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러한 외강내유의 리더십으로 래리 엘리슨은 고희의 나이에도 현역에서 맹활약하는 살아있는 전설이 되고 있다. "인생은 상어와 같다. 늘 앞으로 전진하고 매일 더 잘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죽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그의 최종 목표는 여전히 ing다.
취재_ 임윤경 기자

2021-06-02 49 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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